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/생애 (문단 편집) === 프랑스 혁명과 내전 === 1785년 16세에 [[육군사관학교]]를 졸업하고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. 불과 4년 뒤인 1789년, [[프랑스 혁명]]이 터진다. 나폴레옹은 휴직한 후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의용병 대대의 장이 되었다. 코르시카 의용병대의 대대장이 되면서 이 당시 나폴레옹의 계급은 중령(Lieutenant Colonel)이 되었다. 어떻게 보면 이때 첫 실전이자 사고를 쳤는데, 1792년 2월 혁명 이후 정부로부터 [[교회]]에 대한 재산 몰수가 진행되며 코르시카 섬과 나폴레옹의 의용병대에게도 수도원 해산 지시가 내려졌다. 지역 신망이 두터웠으므로 아작시오 수도원에서 병사들과 이에 반대하는 지역 일꾼 및 백 사람들 간에 실랑이가 오갔는데, 그러던 중 오발 사고로 인하여 부하 소위 한 명이 죽게되었다.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이 강경 진압을 하고자 코르시카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정규군에게 지원과 탄약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지휘관인 마이야르(Maillard) 중령이 이 요청을 거절하고 되려 의용병대 해산을 명령한다. 나폴레옹측은 이 명령을 무시하고 다음날 아침 의용병들과 교회에 쳐들어가 정문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, 민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죽게 된다. 여기까지도 문제가 많으나, 의용병대는 곧 나폴레옹의 통제에 벗어나 상점과 축가를 털며 [[약탈]]과 파괴를 하였다. 나폴레옹의 첫 출전이나 다름없던 이 사건은 처음으로 나폴레옹의 지휘 실책을 드러냈을 뿐 더러, 이 사건으로 당시 코르시카를 주름잡던 파올리에게도 반감을 사게 되었다.[* 출처: James Marshall-Cornwall, ''Napoleon as military commander'', Penguin Books, 2002, pp.21-22] 한편, 같은 달인 1792년 2월 [[프로이센 왕국]]과 [[합스부르크 제국]]이 프랑스를 침공해왔고, 시국이 이렇자 1792년 5월 28일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의용병들과 함께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로 복귀하고자한다. 나폴레옹은 휴직 기간을 한참 넘긴데다, 코르시카 의용병대로 머물던 중 앞서 말한 사고도 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복귀하면서 신변 보호와 변호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, 전쟁과 혁명으로 장교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든[* 가령 나폴레옹의 육사 동기는 총 55명이었으나 그 중에서 나폴레옹을 포함한 6명만이 프랑스에 남아있었다. - 앞의 책p.21 그나마 나폴레옹이 복무하던 포병이 나은 편으로, 보병과 기병 장교의 경우 [[루이16세]] 처형 이후 2/3가량이 해외로 도주하였다. 이 즈음에 그나마 포병대가 괜찮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포병대만은 장교의 해외 이민과 도주가 적어서라고 한다. - 같은 책 p .29] 프랑스 정부는 복귀한 나폴레옹을 바로 대위로 임명하고 그해 7월 10일 4포병대대에 배속시킨다.[* 출처: James Marshall-Cornwall, ''Napoleon as military commander'', Penguin Books, 2002, p.22] 한편, 1793년 1월 [[루이 16세]]가 처형되자, [[유럽]]의 여러 군주제 [[국가]]들은 이를 두려워해서 '''대(對) 프랑스 전쟁'''을 벌이게 되었고, 프랑스는 홀로 [[영국]], 합스부르크 제국, 프로이센 등의 군사강국과 맞서게 되었다. 이 와중에 나폴레옹이 몸담고 있던 [[프랑스 제1공화국]] 또한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었다. [[온건파]]인 [[지롱드파]]와 [[과격파]]인 [[클뢰브 데 자코뱅|자코뱅파]]의 대립이 그것이었다. [[1793년 5월 31일 봉기|1793년 5월 31일, 자코뱅파가 지롱드파를 쓸어버리게]] 된다. 그러자, 이에 반발하여 지롱드파가 많았던 [[리옹]], [[아비뇽]], [[님(프랑스)|님]], [[마르세유]]에서 반란이 터지고 만다. 이러한 혼란속에서 이번에는 [[툴롱]]에서 왕당파가 혁명파들을 쫒아내고는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받아들인 사건이 발생한다. 이 사건이 바로 '''툴롱 포위전'''으로 이어지게 된다. 마침 그 직전인 1793년 6월, 나폴레옹과 그의 가족들은 코르시카의 실력자 [[파스콸레 파올리]]와의 의견 대립으로 코르시카를 탈출한 상태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